휴식

[에세이] 열쇠가 사라진 집

시선지기 2024. 12. 27.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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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쇠를 돌리던 손끝의 감각

문을 나서기 전, 습관처럼 가방속을 뒤적였다. 손에 잡히는 것은 열쇠가 아니라 카드와 이어폰, 핸드크림 같은 것들이었다. 아, 맞다. 이제 열쇠가 없지. 문 앞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열쇠를 손에 쥐고 문을 잠그던 순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나는 열쇠를 돌리던 손의 기억, 그 손끝의 미세한 감각을 잃었다.

열쇠가 품었던 신뢰의 무게

회사 동료와 대화를 나누다 문득 그녀가 말했다.
"주말에 동생에게 집 열쇠를 맡겼는데, 괜히 마음이 이상하더라고요. 열쇠를 준다는게 뭔가... 신뢰의 표현 같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지만, 마음 한편엔 씁쓸함이 스쳤다. 이제 내 집에는 그런 열쇠가 없다.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으로 신뢰를 표현할 수 있을까? 디지털 도어락은 분명 편리하지만, 그 행위가 주는 묵직함은 열쇠와는 사뭇 달랐다. 열쇠를 건네는 행위는 물리적이고 상징적인 반면,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행위는 어딘가 단조롭고 가볍게 느껴졌다. 마치 단순히 숫자를 나열하는 것에 같으면서도, 그 속에 특별한 의미를 찾기엔 부족해 보였다.

문 앞에서 느낀 편리함과 공허함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도어락 앞에 섰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찾으려다 멈췄다. 그렇지, 이젠 열쇠가 없지. 나는 지문을 올려 문을 열었다. 부드러운 소리가 나며 문이 열였다. 편리했다. 아주 효율적이었다. 그런데 문이 열리는 순간, 마음 한편에서 이상한 허전함이 밀려왔다.
내 첫 집 열쇠가 생각났다. 길고 단순한 금속 조각이었지만, 그것은 내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처음 월급을 모아 얻은 작은 방의 열쇠를 쥐었을 때의 묵직한 감정. 나는 그 열쇠를 친구에게 자랑하며 들고 다녔고, 열쇠에 달린 작은 열쇠고리를 바꾸는 일로 나만의 개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열쇠 없는 시대의 인간

새벽에 문득 깨달았다. 열쇠는 단순히 문을 여닫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호의 상징이었으며, 내가 이곳을 지키고 있다는 작은 책임감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열쇠를 돌릴 때마다 나는 물리적으로 문을 잠그며 이 공간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도어락은 그 과정에서 나를 배제했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문이 닫히고, 모든 것을 기술이 대신한다. 그 안에 내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열쇠가 사라지면서 우리는 무엇을 잃은 걸까? 도어락은 분명 더 효율적이고 편리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손끝에서 느껴지던 신뢰의 감각과 물리적 접촉에서 비롯된 보호의 상징성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었다.

열쇠가 남긴 이야기

아침이 밝았다. 나는 출근길에 다시 가방 속을 뒤적였지만, 이번엔 열쇠를 찾지 않았다. 나는 열쇠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열쇠가 가진 이야기를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열쇠 없는 집 앞에서, 나는 오늘도 지문을 올려 문을 닫는다. 그러나 손끝에서 느껴지던 작은 금속의 무게를 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열쇠는 더 이상 없지만, 그 기억은 나에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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