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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혁은 차가운 수술실에서 익숙한 기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그는 기억 조작을 통해 고객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였다. 그러나 그날 그의 앞에 앉은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는 유독 특별해 보였다.
“제 기억을 모두 삭제해 주세요. 이름도, 얼굴도, 과거도 전부요.”
윤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사람들은 보통 고통스러운 기억만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이 남자는 모든 것을 지우고 싶다고 말했다.
“기억 전부를 삭제하면 지금의 당신은 완전히 사라집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과 같아요. 정말 모두 삭제하길 원하십니까?”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게 제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윤혁은 남자를 스캔 기계에 눕히고 장비를 작동시켰다. 그의 머리에 전극을 부착하자, 기억의 타임라인이 모니터에 나타났다. 그러나 삭제할 기억을 분석하던 윤혁은 화면 속 기억에 이상한 단서를 발견했다.
어두운 방, 피투성이가 된 손, “루시드 바이오테크”라는 이름이 찍힌 문서. 그리고 “12-47-9”라는 숫자가 떠올랐다. 윤혁은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요청대로 남자의 기억을 삭제했다.
며칠 후, 윤혁은 데이터베이스를 정리하다가 삭제된 기억 중에서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는 메시지를 발견했다.
“윤혁, 기억을 되찾으려면 루시드에서 벗어나야 한다. 네가 잃은 진실은 바로 여기 있다.”
그 메시지는 윤혁의 숨을 막히게 했다. 자신의 이름이 환자의 기억에 등장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데이터베이스를 더 깊이 파고들며 자신의 기억을 더 면밀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자신의 데이터 기록에서 대학 졸업 이후 약 10년에 해당하는 기억이 대부분 삭제되어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억 삭제 기술은 특정 트라우마나 불필요한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제거한다. 그러나 그의 기록은 거대한 공백처럼 비어 있었고, 이는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이 분명했다.
윤혁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분명히 루시드 바이오테크라는 첨단 연구소에서 일했다. 당시 그는 기억 조작 기술 개발을 돕는 연구원으로 채용되었지만, 그 이후의 모든 기억이 끊겨 있었다.
“내가 그곳에서 뭘 했던 거지?”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남아 있는 단편적인 기록에는 이상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피실험자 12-47-9: 반복적인 기억 삭제 및 복원 실험 진행 중. 실험체는 현재 안정 상태를 유지하며, 조작된 기억을 현실로 인식하고 있음.”
윤혁은 자신이 단순히 연구원이 아니라 기억 조작 기술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대학 졸업 후 자신이 겪었던 모든 경험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들이 나를 이용했어…” 윤혁은 속삭였다.
윤혁은 자신의 기억 데이터를 복구하기로 결심했다.
복구 작업은 위험했다. 기억 조작 기술은 기본적으로 뇌 속의 뉴런 연결망을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하지만 데이터를 복원하는 장치는 기존의 삭제된 기억을 억지로 되살리기 때문에 현재의 정체성과 충돌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복구 장치가 기억의 흐름을 데이터화하고, 뇌파의 패턴을 분석해 손상된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용자가 복구된 기억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 심각한 뇌 손상이나 정신 붕괴를 초래할 수 있는 위험한 과정이었다.
하지만 윤혁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이 작업을 피할 수 없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장치의 냉각기를 작동시켰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에 전극을 부착한 뒤, 복구를 시작했다. 뇌파 패턴이 실시간으로 스캔되며 장치는 삭제된 기억 데이터를 추적해 복원하기 시작했다.
장치가 작동하자 윤혁의 머릿속에서 잊혀졌던 장면들이 마치 폭발하듯 쏟아져 들어왔다.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희미했지만,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그의 기억 속에서 선명히 떠올랐다.
“윤혁은 완벽한 테스트 모델이다. 그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삭제하고 복원하며 기술을 안정화시켰다.”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가 진실을 알게 되면 또 지우면 된다. 그는 단순한 도구일 뿐이다.”
윤혁은 깊은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단순히 기억 조작 기술을 사용하는 의사가 아니라, 루시드 바이오테크의 실험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의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환자들에게 사용하던 기술이 사실 자신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삭제하고 복원하며 완성된 결과물이라는 진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문성이란 이름으로 쌓아온 삶이 철저히 조작된 기억들로 이루어진 허상이었다는 사실이 그를 짓눌렀다.
복구 작업이 끝난 후, 윤혁은 자신이 수십 번의 기억 조작 실험을 겪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아온 삶의 모든 것이 조작된 기억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는 냉혹한 진실과 마주해야 했다.
그러던 중, 윤혁은 데이터를 분석하다 또 다른 단서를 발견했다. 그것은 “12-47-9”이라는 숫자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자신을 지칭하는 피실험체 번호라고 생각했지만, 데이터를 더 깊이 분석하던 중 이 숫자가 특정 위치를 암호화한 것임을 깨달았다. 숫자 조합을 지도 시스템에 입력하자, 루시드 바이오테크의 연구소 위치가 지도에 표시되었다.
그는 그곳으로 향했고, 연구소 내부에서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파일과 서버를 발견했다.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윤혁: 초기 기억 조작 실험체. 반복적인 기억 삭제 및 복원 테스트 성공. 현재 상태: 클리닉 관리자 역할 수행 중. 피실험자는 조작된 기억을 자신의 진짜 기억으로 인식하고 있음.”
윤혁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자신은 루시드 바이오테크의 실험체였으며, 그들이 자신을 이용해 기억 조작 기술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이제 그는 선택해야 했다.
복수를 위해 루시드 바이오테크를 무너뜨릴 것인가.
혹은 모든 기억을 다시 삭제하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것인가.
윤혁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 두 손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고통스러운 기억에 시달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을 알게 된 지금, 이대로 외면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자신을 실험체로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하지 않고 그냥 사라질 수 있을까?
윤혁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봤다. 밤하늘에 떠 있는 희미한 별빛이 어딘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내가 진짜 원하는 건 대체 뭘까…”
그는 자신에게 묻고 또 묻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느리게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싸늘한 밤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지만, 무언가가 그를 앞으로 내몰고 있었다.
결정은 내리지 못했지만, 윤혁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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